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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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곡(中谷)동은 ‘가운데 마을’, ‘간뎃말’이라고 불렸으며, 아차산과 중랑천 사이 면목동과 능동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다.
삼국 시대에는 지금의 아차산을 중심으로 한강 지역을 차지하려는 패권 다툼의 중심지이기도 했으나,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에는 한양의 배후지로서 수도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조선초기, 중랑천을 중심으로 설치된 드넓은 왕실 목장(馬場)은 오랜 시간 이 일대의 성격을 규정 지었다. 근대에 들면서 기존의 왕실 목장은 폐쇄되었고 교외 농경지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 받았으나, 도시발전으로 인하여 한적한 동네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거지로 부각되었다. 6•25전쟁 이후에는 서울 동부지역의 관광 및 여가의 공간에 포함되어 국제 대회 유치를 위한 종합경기장의 건설 등이 한동안 계획되었으나 무산되면서 한동안 도시의 개발이 늦어진 지역으로 남았다.
이후 중곡동은 수도 서울의 지속적인 팽창과 인구 증가를 해결하기 위해 수립된 서울 도시기본계획(1966)에 따라 주거지의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 말 서울 최초의 민간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대규모 주거지로 재탄생 하였다. 도심에서 이주한 철거민들이 개천가와 아차산 자락에 모여들고 대규모 한전 주택단지, 오디오 제조회사인 ‘천일사’ 등이 생겨나 삶의 공간이자 일터가 만들어지면서, 고향을 떠나온 많은 이들이 정착할 수 있는 안정적인 신향(新鄕)이 되었다.
삼국 시대에는 지금의 아차산을 중심으로 한강 지역을 차지하려는 패권 다툼의 중심지이기도 했으나,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에는 한양의 배후지로서 수도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조선초기, 중랑천을 중심으로 설치된 드넓은 왕실 목장(馬場)은 오랜 시간 이 일대의 성격을 규정 지었다. 근대에 들면서 기존의 왕실 목장은 폐쇄되었고 교외 농경지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 받았으나, 도시발전으로 인하여 한적한 동네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거지로 부각되었다. 6•25전쟁 이후에는 서울 동부지역의 관광 및 여가의 공간에 포함되어 국제 대회 유치를 위한 종합경기장의 건설 등이 한동안 계획되었으나 무산되면서 한동안 도시의 개발이 늦어진 지역으로 남았다.
이후 중곡동은 수도 서울의 지속적인 팽창과 인구 증가를 해결하기 위해 수립된 서울 도시기본계획(1966)에 따라 주거지의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 말 서울 최초의 민간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대규모 주거지로 재탄생 하였다. 도심에서 이주한 철거민들이 개천가와 아차산 자락에 모여들고 대규모 한전 주택단지, 오디오 제조회사인 ‘천일사’ 등이 생겨나 삶의 공간이자 일터가 만들어지면서, 고향을 떠나온 많은 이들이 정착할 수 있는 안정적인 신향(新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