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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재시화첩

양정재시화첩(養正齋詩畫帖)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은 명분과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강직한 삶의 태도를 유지하며 ‘송자(宋子)’라 불릴 만큼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던 산림이자 문인 관료였다. 또한 서인(西人)의 영수로 그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많이 등장할 정도로 조선 후기 학문과 사상, 정치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던 인물이다.


송시열을 기리며

 

《양정재시화첩(養正齋詩畫帖)》에는 바로 ‘우암송선생진상(尤庵宋先生眞像)’이라는 화제가 적힌 송시열 초상과 수제자 권상하 등이 쓴 화상찬(畫像贊)이 실려 있어서 그 제작 연유가 주목되는 작품이다. 일반적인 화첩과 마찬가지로 《양정재시화첩》의 끝에도 주문자의 발문이 실려 있어서 그 제작 경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이 화첩은 송시열의 제자인 양정당 최방언의 8세손 최병헌이 오랜 벗 구필회의 집안에 송시열과의 깊은 인연을 보여주는 시화첩이 소장되어 있어 이를 김용로라는 인물에게 부탁하여 1922년에 모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첩은 총 14면으로 먼저 1면부터 8면까지는 1697년 송시열의 후학 윤준, 권섭, 최수경, 구성문 등이 주도하여 송시열 초상을 모사하고 그를 추모하는 서원과 영당, 각 집안의 별서에 봉안한 후 그 전말을 기록하기 위해 초상화첩을 제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초상화 봉안처를 회화식 지도 형식으로 그려낸 실경산수화 6점과 송시열 초상 1점, 화상찬 3편, 초상화 제작 및 봉안에 참여한 이들의 명단과 권섭이 쓴 발문이 차례로 장첩되어 있다. 실경산수화는 넓은 지역을 담아내는 가운데 중요한 지리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초상화 봉안처나 송시열의 행적이 남아 있는 양정재시화첩(養正齋詩畫帖) 경물은 크게 표현함으로써 강조하였다. 특히 유일하게 한양을 그린 〈삼청촌사(三淸村舍)〉는 북쪽 백악산과 삼각산을 배경으로 경복궁과 삼청동천이 펼쳐져 있고 십자교가 보여, 현재의 경복궁 동십자 각 남쪽 부근을 그린 것으로 주목된다. 〈도성대지도〉와 비교해보면 육조거리 관청 건물 뒤편의 민가 중 한 곳으로 추정되는데 『송자대전(宋子大全)』에 실린 송시열의 편지글에 ‘삼청동구(三淸洞口)로 옮겨서살았다’는 기록이 있어 송시열의 한양 거처를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어지는 9면부터 13면까지는 앞서 송시열 초상화 제작을 주도했던 구성문의 집안에서 1715년을 전후하여 제작한 『청담시첩(淸潭詩帖)』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구성문의 부친이며 송시열의 제자였던 구시경은 경기도 고양군 청담동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였는데 1668년 송시열이 이곳을 방문하여 ‘청담동(淸潭洞)’이라는 글씨와 ‘서산정사(西山精舍)’라는 편액, 그리고 차운시를 남겼다. 세월이 흘러 풍산 홍씨 집안의 홍석보가 청담동에 새로 터를 잡게 되자 구성문의 큰아들 구만손이 송시열의 글씨와 시를 수습하고 송시열의 제자 김창집, 이병연·이병성 형제 등 10여 인에게 시를 요청하여 함께 엮은 것이 바로 『청담시첩』이다. 즉 《양정재시화첩》에는 송시열을 계승한 문인들이 그의 사후인 1697년 초상화를 제작·봉안했던 일과 1715년경 그의 묵적을 수집했던 일을 기념하는 내용이 함께 담겨 있다. 이와 같은 송시열에 대한 일련의 추모 행위를 통해 그들은 학문적 정통성을 강화하고 서로 간의 결속을 도모하였을 것인데 《양정재시화첩》은 그러한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하나의 역사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3면 삼청촌사(좌), 도성대지도 부분(우)

 

3면 삼청촌사(좌), 도성대지도 부분(우)

 


송시열 초상과 화상찬

 

《양정재시화첩》 중 송시열 초상과 화상찬은 그에 대한 추숭 행위에 있어 주요한 수단이었기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권섭의 발문에 따르면 1697년 초상화는 송시열의 제자 김진규가 송시열 생전에 제작했던 유지초본을 토대로 화원 윤상익이 정본을 그리고 숙종 어진 제작에 참여했던 조세걸의 교정을 거친 후, 이를 화원 최수만에게 그대로 베껴 그리게 한 것이다. 현재 《양정재시화첩》의 송시열 초상은 바로 1697년 봉안 본을 축소하여 화첩으로 장첩했던 것을 후대에 다시 임모한 것이 된다. 초상화 속 송시열은 도포에 방건을 쓰고 오른쪽을 향해 두 손을 모은 자세의 반신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화가의 역량 차이와 제작 당시 화풍이 자연스럽게 배어 들어감에 따라 약간의 변용이 되었다. 다소 거칠게 답습된 부분이 있으나 원본의 모습을 추정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송시열은 사후 명성에 걸맞게 여느 인물보다 많은 7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고 상당한 양의 초상화가 제작되었다. 모두 심의나 포에 복건 혹은 방건을 착용한 모습으로 재현되었으며 《양정재시화첩》의 초상화 역시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초상화에 이어지는 권상하와 김창협, 정호의 화상찬은 송시열의 풍모와 위상을 언어로 표현해낸 또 다른 형식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19세기 문인 홍한주는 다음과 같은 김창협의 화상찬에 대해 ‘진실로 선생의 칠분(七分)’이라 평하기도 하였다.

 

 

 

 

 

김진규, <송시열 초상 초본>, 1680년, 국립청주박물관 기탁(좌) / 4면 권상하 화상찬(중) / 송시열 초상(우)

 

김진규, <송시열 초상 초본>, 1680년, 국립청주박물관 기탁(좌) / 4면 권상하 화상찬(중) / 송시열 초상(우)

 

 

영웅호걸의 자질을 지니고서 깊은 못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 전전긍긍 근신하는 공을 닦았다.

좁은 방 안에 모은 호연지기는 우주를 채울 만하고 작은 한 몸에 짊어진 막중한 짐은 화산과 숭산에 비길 만하다.

조정에서 불러들여 묘당에 두고 제왕의 스승으로 삼았으나 거만한 기운을 찾아볼 수 없고

물러나 초야에 처했을 때는 고라니와 사슴을 벗하였으나 궁색한 기색을 볼 수 없었다.

하수의 격류에 우뚝 선 지주처럼 당당하고 엄동설한에 홀로 푸른 소나무처럼 늠름하였다.

행여 억만대 이후에 이 화상을 살펴본다면 조선 삼백 년간의 정기가 한 몸에 모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문인 안동 김창협 찬(출처 고전번역원)

 

앞서 초상화 속 송시열의 모습은 평생 주자의 학설을 잇는 것으로 자부했던 그가 의도한 이상적인 성리학자의 이미지였으며 그의 학문과 정치이념의 계승을 표방했던 문인들에게는 자신들 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권상하 등 세 명의 제자가 지은 화상찬 역시 『송자대전』도 수록되는 등 거유(巨儒) 송시열의 풍모와 위상을 가장 잘 설명하는 찬으로 권위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시각과 언어적 측면에서 하나의 전형으로 완성된 초상화와 화상찬은 송시열 계승자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수 백 년 동안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었고, 특히 《양정재시화첩》은 두 가지가 결합 되어있는 형식으로서 이른 사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양정재시화첩》은 1922년에 새롭게 모사한 것이기는 하나 조선 17세기 말 이래 문인들이 초상화와 화상찬의 제작·봉안을 통해 선현(先賢)을 추모하고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했던 과정과 이러한 전통이 일제강점기인 20세기 초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층위가 담긴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작성자 : 정지인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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