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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과 반촌 (상세내용은 본문 참조)

성균관과 반촌

전시기간
2019-11-08 ~ 2020-03-01
전시장소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A
담당부서
전시과

전시소개

서울역사문화특별전 '성균관과 반촌'   泮宮 泮村

Sungkyunkwan Nat’l Academy and Its Surrounding Village, Banchon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그 마을인 ‘반촌泮村’ 그리고 그 곳에 살았던 성균관 유생과 반인의 이야기를 전시로 기획하였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후기 성균관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그림 〈반궁도泮宮圖〉《태학계첩太學稧帖》(1747)과 20년간 성균관 유생으로 생활하며 쓴 윤기尹愭(1741∼1826)의 시문집 『무명자집無名子集』 「반중잡영泮中雜詠」, 그리고 반인泮人들의 시를 모은 『반림영화泮林英華』(1820)도 최초로 공개됩니다. 성균관의 명륜당을 옮겨다 놓은 전시실과 반인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통해 18세기 ‘성균관과 반촌’이라는 원조 대학촌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 성균관

성균관은 ‘태학太學’, ‘반궁泮宮’, ‘현관賢關’, ‘근궁芹宮’, ‘수선지지首善之地’ 등으로 불렸다. 조선이 건국하면서 한양으로 천도한 후 성균관은 한양 숭교방崇敎坊에 자리잡았다. 성균관은 공자와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이념과 국가의 토대를 탄탄히 다지는 곳이었다.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성균관 의례인 석전대제釋奠大祭,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활을 쏘았던 대사례大射禮와 왕세자 및 왕세손이 성균관에 입학하는 왕세자 입학례入學禮도 성균관에서 행해졌다.

또한 성균관은 어진 선비를 육성하는 교육기관, 즉 선비의 기운을 나라의 기운으로 여겨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성균관은 국립대학이며 성균관의 유생은 국립대학생이다. 그들은 전국 양반 중 소과小科에 합격한 200명의 수재로 성균관에서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관료가 되기 위해 학문을 닦았다. 즉 문과文科의 대과大科라는 과거에 합격하는 날이 성균관을 졸업하는 날이었다.

 

성균관 앞 동서로 즐비한 반촌

성균관을 둘러싸고 흐르는 반수泮水가 흘렀고, 그 주변의 마을을 반촌泮村이라고 했다. 반수만 건너면 성균관으로 갈 수 있었으니 성균관 공노비인 반인泮人이 지리적 이점으로 반촌에 자리 잡았다. 조선초기부터 반촌은 반인들의 거주공간으로 조성되었고, 반인들은 그 안에서만 거주해야 했으며 외부인은 반촌에서 거주할 수 없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성균관 수복 외에 반주인泮主人, 시를 짓는 반인과 서당, 현방과 현방 주인 등이 나타난다. 반주인은 과거를 보려고 서울로 올라온 지방 유생이 성균관 근처에서 묵던 집, 또는 그 집의 주인을 이르는 말로, 다른 말로 관주인館主人이라고도 하였다. 유생들과 가까이 했던 반촌의 주민들은 배움의 열망을 시로 표출하기도 하여 시를 짓거나 서당의 훈장으로 반촌의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한 소고기를 파는 가게의 주인도 있었는데, 성균관의 제사의 제물이나 유생의 식사에 필요한 소고기 마련을 위해 반인들이 소를 도살했던 성균관 내 도사를 17세기에 현방(소고기 가게)으로 재편하였다. 이 에 따라 조선후기부터 반인들은 성균관 역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한양 내 20여 곳의 현방을 운영하는 상인으로 변모했다.

 

성균관과 반촌 티져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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