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유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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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정, 북녘 북北자에 정자 정亭, 옛날에는 우물 정井자를 썼다고도 하고, 정자 정亭자를 썼다고도 해요. 근데 그러면 왜 북정마을이냐. 예전에 궁에서 쓸 메주를 우리 동네에 권리를 줘가지고 메주를 갖다 바쳤는가 봐요. 그래서 메주를 쑤다 보니까 사람도 뭐 여럿이 북적북적 거리고, 메주 끓는 소리도 북적북적 거리고 그래서 북정마을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해요. - 김경동, 북정마을 통장

현재 전시가 한창인 한양도성박물관의 ‘도성과 마을’展 전시장에 걸린 설명문 중 한 구절이다. 그런데 이 말과 유사한 내용이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에 작성된 한 고문서에 담겨 있다. 바로 서울시 유형문화제 제182호인 ‘성북동포백훈조계완문절목(城北洞曝白燻造契完文節目)’이다. 이 문서에는 조선시대 성북동 주민의 생활에 관련된 내용이 전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현재 ‘도성과 마을’展에 주요 유물로 전시되어 있다.
이 유물은 1805년에 훈련도감에서 발간된 완문(完文) 및 절목(節目)인데, 여기서의 완문이나 절목은 관청에서 어떠한 권리를 주민들에게 인정해주고 거기에 뒤따르는 규정을 명시한 것이다. 내용은 바로 주민들이 운종가(현재 종로)의 시전(市廛)에서 소용되는 포목을 삶고 말리거나 메주를 담그는 일을 맡기고 거기에 뒤따르는 수입을 인정해주는 것이었다.
 
조정에서 특별히 거주민들의 생계를 헤아려서 목면(무명), 포(베), 저(모시) 세 가지 점포에서 포백할 물건과 송도의 모시 전부를 본 동리의 거주민에게 주어서 삶아서 익히게 하였다. 무자년 겨울에는 훈조막(메주 쑤는 곳)을 설치해서 비변사에서 총융청에 관문(關文:공문서)을 보내어 연융대 훈조막에 있는 숙련자 한 사람을 본 막으로 보내어 가르치게 하고 동리의 거주민으로 하여금 배워서 생활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 완문(完文) 중 일부
 
조선시대 성북동은 산악이 험준하여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었다. 반면에 성곽이 지나가고 인근에 숙정문과 혜화문이 있어서 군사적으로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곳에는 군인들이 있어야할 곳이었다. 문서의 내용에 의하면 이곳에는 군인들의 진영인 둔진(屯鎭)을 설치해서 이들과 그 가족들을 살게 하고 농사를 짓지 못하는 대신에 시전에서 판매하는 포목을 삶아서 말리는 일을 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수료를 챙기도록 하였다. 또한 겨울철에는 메주를 담가서 시전에 납품하도록 했다.
 
무명 베 모시를 포백하는 수공은, 무명은 매 동(50필)마다 임금이 4냥이고, 베는 매 동마다 노임이 6냥 5전이며, 모시는 매 동마다 노임이 10냥씩이다. 아울러 비변사에서 결정해준 예에 따라 받되 감히 위반하지 않는다. – 절목(節目) 중 일부
 

군인과 그 가족들의 노임은 무명 1동(50필)을 삶고 말리는데 4냥, 베는 한 동에 6냥 5전, 모시는 10냥씩이었다. 세 가지 직물 중 모시가 제일 비싼 것을 보니 제일 공정이 힘들었던 것 같다.
오늘날의 전시대상 지역인 성북동은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마주하면서 사는 지역인 반면, 조선시대에는 부자들은 없었던 곳이었다. 현재 성북동의 ‘북정마을’과 ‘장수마을’은 이웃한 부자들과는 다른 성격의 동네이지만 마을공동체를 통해서 변화해가는 중이라고 한다. 아마도 조선시대 포목과 메주를 다루면서 어우러져 살던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작성자: 김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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