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양도성의 건설과 관리
한양도성의 건설
도성은 그 위치, 규모, 형상, 격식 등을 통해 한 나라의 위상과 통치 이념을 드러내는 공간이자 구조물의 집적체이다. 모든 정령(政令)은 도성 안에서 나오며, 중요한 국가 의례는 모두 도성 안에서 이루어지고, 뛰어난 인재(人材)와 물자는 도성으로 모여든다. 1392년에 개창된 조선왕조가 새 도읍으로 정한 한양은 고려의 남경(南京)이었으나 성벽조차 없던 곳이었다. 조선왕조는 이 땅의 자연 형상을 따라 성벽을 쌓고 유교적 이상도시론에 맞추어 내부 공간을 채웠다. 도성 안의 도로는 성문을 통해 전국으로 이어졌으며, 도성 남쪽에서 동서로 흐르는 한강은 물자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중엽, 일본과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도성이 함락되고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성벽이 무너지면 다시 쌓고 성문이 퇴락하면 고쳐 지으면서 도성의 기본 구조는 조선왕조 500여 년 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도성의 관리와 생활
도성은 왕의 존엄과 나라의 권위를 표상하고 수호하는 시설로서 그에 걸맞은 권위를 지녀야 했다. 세종 대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성벽을 따라 안팎으로 순심로(巡審路)를 내었는데, 군사들이 매일 이 길을 다니며 이상 유무를 관찰하고 이상이 발견되면 담당 관서에 알려 보수하게 했다. 왕과 외국 사신들이 자주 드나드는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특히 화려하고 웅장하게 만들었으며, 문루는 화재 감시용 망루 역할도 했다. 도성은 서울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직접 강력히 규제했을 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백성에게도 상징적, 실체적인 영향을 미쳤다. 서울 주민들은 도성 문이 여닫히는 시각에 따라 일상생활을 영위했으며, 매일 성벽을 보고 살았다. 영조 대 ‘수성절목(守城節目)’이 제정된 이후에는 모든 도성민에게 유사시 달려가 지켜야할 성벽 구간이 할당되었다. 지방에서 상경上京하는 사람들은 성벽과 성문을 보고 서울을 인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