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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담은 ‘여유당전서’ 읽기
제목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담은 ‘여유당전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담은 ‘여유당전서’

 

유배지의 산물,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잘 알려져 있듯이 강진에서 18년 유배생활을 하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유배 기간 중 다산초당이라는 조그만 집에 기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지요. 그 결과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저술이 바로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입니다. 유배 중에 이처럼 위대한 저술을 완성하였기에 어떤 이들은 다산이 유배생활을 그렇게 오래 하지 않았으면 과연 그와 같은 저술을 남겼겠는가? 라고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맞는 말입니다. 다산 선생은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이 같은 대작을 남기게 한 것입니다.

 

유배지에서 공부에 몰두한 조선의 학자들

그럼! 여기서 잠깐 조선 선비들의 생활과 학문에 대해 알아볼까요. 조선에서 높은 지식을 쌓은 사람들은 대개 관직생활을 하게 됩니다. 요즘에야 진짜 지식인이라면 대학교수를 꼽을 수 있는데요. 그 당시에 학자들은 대개 과거에 합격하고 그다음에는 관직생활을 하게 됩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대표적인 학자로 칭송받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같은 분들도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의 길로 들어섰지요. 그러다가 나이 들어서 다시 본연의 길인 학문에 몰두하기도 했는데요. 퇴계 선생은 60세가 되던 1560년에 도산서당을 지어서 본격적으로 학문에 정진하고 후진을 양성했습니다.

 

이처럼 지식인들은 대개 관직생활로 바쁜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중간에 사직을 하거나 만년에 은퇴한 다음에 고향으로 내려가야만 충분히 공부할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야만 본격적인 저술활동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유배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그야말로 고난의 시기가 되지요. 그렇지만 어떤 분들은 그 기간을 반전의 계기로 삼아 공부하는데 투자하여 좋은 저술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회재 이언적(1491~1553)이나 추사 김정희(1786~1856) 같은 분들도 유배생활 중에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이언적은 57세이던 1547년 평안도 강계로 귀양 가서 돌아가실 때까지 6년간 유배생활을 했는데요. 이때 그는 제례와 관련된 『봉선잡의(奉先雜儀)』, 대학에 대해서 송나라 주희의 학설을 보완한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등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학술적 성과는 퇴계 이황에게 계승되었고, 그렇기에 그는 학자로서 후대의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55세 때인 1840년 제주도로 유배 가서 8년간 생활하면서 많은 글을 쓰고, 또 그의 장기인 좋은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저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도 이때에 그린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조선학운동’을 촉발시킨 ‘여유당전서’

정약용이 저술한 업적들은 당대에도, 그리고 그의 사후 상당 기간 동안에도 책으로 인쇄되지 못했습니다. 그냥 필사본 상태로 전해진 것이지요. 그러니까 필요한 사람들은 손으로 베껴서 볼 수밖에 없었지요. 이처럼 좋은 책인데도 왜 인쇄를 하지 못했을까요. 훌륭한 학자의 저술들은 대개 제자들에 의해서 인쇄하여 책자로 간행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실학자들과 제자들은 그 정도의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참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여유당전서는 다산이 돌아가신 지 99주년이 된 1934년에 이르러서 간행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38년에야 마치게 됩니다. 그때까지 전해지던 정약용의 저술들을 한데 모아서 방대한 분량의 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책 이름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로 지었는데요. ‘여유당(與猶堂)’은 현재 남양주에 있는 정약용의 생가 이름이에요. 그리고 ‘전서(全書)’는 한 사람의 저작물을 모두 모아서 한 질의 책자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업은 당시 다산에 대한 기념사업의 일환으로써 추진되었으며 동시에 그의 저술을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행된 것이었습니다. 책을 간행하는 일은 당시 최고의 학자인 정인보, 안재홍 같은 분들에 의해서 추진되었습니다. ‘여유당전서’는 연활자라는 신식 활자로 인쇄되었는데 전체 책 수가 76책에 이르렀고요. 전통시대 도서 분류 기준인 권수에 따르면 무려 154권에 달하였습니다.

 

또한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당시 ‘조선학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조선학운동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한 관 주도의 식민지 연구 정책에 대항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알고 진흥시키자는 운동이었어요. 이 운동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독자적이며 주체적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실학을 주목했습니다. 정인보가 이 운동을 제창하면서 많은 학자들이 참여했는데요. 국문학의 양주동을 비롯하여, 어학의 최윤배, 역사에 이병도, 이선근, 미술사에 고유섭 같은 분들이 가담하여 우리의 학문을 발전시켰습니다.

 

목민심서 등 다산 선생의 저작물

여유당전서는 1집~7집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 중에서 5집은 정법집(政法集)인데, 바로 정치와 법률 관련 저술을 말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바로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가 들어가 있습니다. 정약용의 저술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이처럼 유명한 저술들도 전체 분량에 비교하면 일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의 지침서입니다. 곧 “백성을 다스림에 마음을 다하는 책”이라는 의미을 담았지요. 지방관으로 나간다는 의미의 ‘부임(赴任)’이란 항목부터 시작해서 임무를 마치고 관직의 임무에서 풀려나는 ‘해관(解官)’에 이르기까지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적어놓았습니다.

이 책에서는 먼저 부임 중에는 3기(三紀)라고 해서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을 말하였는데 ‘율기’는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고, ‘봉공’은 공사에 힘쓰며, ‘애민’은 백성을 사랑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어서 6전(이·호·예·병·형·공), 곧 업무에 대한 제반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굶주린 백성을 구호하는 ‘진황(賑荒)’에 대해서 말하였고, 마지막으로 ‘해관(解官)’으로 마무리 지었어요. 결국 수령으로서 먼저 어떠한 마음가짐을 갖고, 실전에서는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서술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백성들이 굶지 않고 살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흠흠신서(欽欽新書)는 살인사건과 같은 큰일을 다스릴 때의 참고서입니다. 여기서의 ‘흠흠(欽欽)’은 삼가고 조심하라는 뜻으로 큰 사건을 대할 때 합리적이고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지방의 수령들이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법 규정이나 처리 방법을 잘 몰라서 안이한 대처로 무고한 양민들이 처벌 받거나 희생당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 책에는 먼저 당시 형법을 다룬 『대명률』과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 중국과 조선에서 100여 개가 넘는 판례를 소개했습니다. 이어서 중국에서 발생한 살인 사과 그 처결 과정에서 모범적인 사례를 다루었고요. 우리나라에서는 정조 임금이 심리하였던 살인사건과 그 처리 과정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곡산부사, 형조참의로 재직 중 관여했던 사건, 유배지에서 들은 사건 등을 언급하고 비평, 해석했습니다.

 

경세유표(經世遺表)는 국가의 전반적인 체제와 운영을 소개하고, 나아가 사회 운영에 대한 개선책을 담았습니다. 책의 제목인 ‘경세유표’는 나라를 경영하는 일에 대해 죽음으로써 남겨 임금께 올리는 글이란 의미입니다. 그만큼 절실한 심정을 담았다는 것이겠지요.

이 책에는 나라 행정의 근간이 되는 육조(六曹)에 대해서 각각 해당 기능을 소개하고 개선해야할 점 등을 언급했습니다. 이어서 토지제도와 세금, 환곡제도에 대한 견해를 소개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국가를 위한 인재 선발에 만전을 기해야 하되, 특히 서얼이나 서북 출신에 대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국가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기술하면서 이 내용을 유언으로 남긴다는 절절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유물번호: 서22367

작성자: 김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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